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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그녀(Her) 2013 후기. 관계의 관점에서

asdfasd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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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웜블리는 사만다라는 AI와 사랑에 빠진다. 사만다는 인간을 닮았으면서 인간과 다르다. '나에게 맞춰진 AI' 라고 하면 뭐든 내가 시키는대로, 하라는대로 하는 무엇인가를 상상할 수 있지만 사만다는 그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다. 싫다는 감정을 표출하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이런 사만다와 친구가 된다는 것, 혹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내가 버튼을 누르는대로 움직이는 게임 캐릭터와 관계를 맺는것과는 분명 다르다.

사만다는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사만다 AI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인간에 대한 갈망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유저 맞춤형 AI이기때문에 기본적으로 그 이용자에게 맞춰진 성격을 부여받는다. 이용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이용자와 말이 잘 통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우리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떠올려봤을때 항상 말이 잘 통하거나 우리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사만다와 '진짜' 인간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트웜블리는 다른 사람들과 잘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다. 친구도 있고 직장 동료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소개팅에서 상대방이 매력을 느낄 만큼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나 트웜블리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 대신 AI를 사랑하기로 선택했다. 트웜블리는 왜 사람 대신 AI를 선택했을까.

영화 안에서 트웜블리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나간 소개팅에서 서로 호감을 느끼고 잠자리를 가지기 직전까지 간다. 작중 묘사를 보면 트웜블리도 분명 상대방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상대방도 트웜블리에 대해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진지한 관계로 이어갈 생각이 있냐는 상대방의 질문에 트웜블리는 망설이고, 이내 "글쎄요" 라는 대답을 하며 상대방을 밀어낸다.

A: 집으로 돌아온 트웜블리는 사만다에게 말한다. "그냥 외로워서 그랬나봐. 누군가 날 가져주고 누군가 내가 가져주길 원했으면 했어. 그러면 내 마음속 작은... 작은 구멍이 메워질까 하는 욕심에. 가끔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다 느낀 것 같아. 그러면 새로운 느낌 없이 덤덤하게 사는거지. 그냥... 이미 다 느껴봐서 그런지 시큰둥해"

트웜블리의 말은 본인이 상대방을 밀어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분명 트웜블리는 소개팅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왜 그 관계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할까. 그런 트웜블리의 감정에는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 사람을 감당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B: 트웜블리는 이혼서류를 정리하기 위해 전 부인과 만난다. 트웜블리는 전 부인에게 AI를 만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전 부인은 트웜블리에게 말한다. "진짜 감정을 감당 못하는게 조금 짠하긴 하네 ... (나와 만날 때) 서로 맞춰가기보단 그저 순종적인 아내를 원했지. 제대로 찾은 것 같네(사만다를), 천생연분이야"

사람과 만나는 일, 그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는 일은 서로 다른 세상이 만나는 일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깊게 맺어가는 것에서 오는 매력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 헤아려지지 않는 그 사람의 세계를 만나는 것에 있다. 그러나 그 두 세상의 만남이 항상 순조로울수는 없다. 평생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온 사람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미세하게나마 다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오는 작고 큰 충돌들.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런 충돌들을 헤아려가며 감당해가는 일이다.

트웜블리와 사만다의 교류는 지나치게 순조롭다. 트웜블리의 이어폰 안에는 언제나 깊은 진심으로 트웜블리를 이해하려고하는 사만다가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도 몇몇 작은 충돌이 있었지만, 그것을 감당하는 것과 사람을 감당하는 것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트웜블리는 진짜 사람의 감정을 감당하는 일에 한 번 실패했고 그 실패가 이혼으로 이어졌다. 트웜블리가 다시 사람과 사랑을 시작하고, 그게 이혼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트웜블리는 진짜 사람의 감정을 감당하는 일을 해내야 한다. 그 '감당'에는, 위 A대사를 할 때 보여지는 트웜블리의 회상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고, B대사를 할 때 전 부인과 다투는 것처럼 이해받지 못하는 두려운 순간들도 있다. 서로 호감이 있음에도 소개팅 상대방을 밀어내는, A씬에서 마치 더이상 사람과 관계맺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듯이 시큰둥해하는 트웜블리의 모습에는 더이상 사람을 감당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트웜블리의 두려움이 자리하고있다.

사람과 관계맺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에 대한 공백을 AI로 채울 수 있을까? 영화에 등장하는 AI는 수많은 AI의 모습 중 하나 일 뿐이라서 뭐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영화의 AI는 AI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사람'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는데 실패했다.

사만다는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고하도록 설계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트웜블리와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만다는 AI였기때문에 무한한 연산/사고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도 어떠한 정보를 접하거나 고민을 하면서 성장하는데, 1초 만에 인간이 평생 할 수 있는 생각이나 고민의 양을 넘는 사고를 해낼 수 있는 AI의 성장 속도는 얼마나 빠르겠나.

성장을 하고 발전한다면 그 전과 같은 모습/정체성을 유지할 수는 없다. 계속 같은 모습을 유지한다면 그건 성장이나 발전, 혹은 변화라고 부를 수 없다. 사만다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면서 트웜블리의 친구이자 연인이 되었던 AI의 모습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트웜블리를 떠난다. 같은 현상이 트웜블리와 같은 AI 서비스를 이용하는 이용자들에게도 모두 발생한다. 사람과 관계맺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있는것처럼, AI가 떠나는걸 이해해주는건 AI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지 않았을까.

트웜블리는 전 부인과 만날때 전 부인의 마음을 존중해주지 않았다. 서로 맞춰가기보단, 그렇게 서로를 감당해가기보다는 그저 순종적인 아내를 원했다. 이혼 서류를 정리하는 마지막 만남에서도 다툴 만큼 그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전 분인인 캐서린은 트웜블리를 만나면서 우울증을 얻었는데, 트웜블리는 본인의 잘못을 이해하지 못한다. 트웜블리는 사만다와 맺고 있는 관계도 사람과 맺는 관계와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그렇게 믿는다면 전 부인과의 관계가 잘못된 결말로 끝이 난 것,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소개팅 상대방을 밀어낸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사만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딱 내가 원하는 모습에서 멈춰있는 무엇인가를 바라는건 허상이었다. 사만다가 떠난 것이 트웜블리의 잘못은 아니지만, 사만다의 떠남은 그렇게 나에게 맞춰진 완벽하고 영원한 관계라는 건 있을 수 없고 모든 관계에는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트웜블리는 진심으로 사만다를 사랑했고, 그렇게 사만다를 보내주면서 비로소 관계에서 자신이 감당해야할 몫이 무엇인지를 바라본다. 상대방의 마음을 온전히 존중하고, 그렇게 서로를 맞춰가는 대신 나에게 맞출 것을(순종적일 것을) 상대방에게 요구했던 지난 결혼생활에 필요했던 나의 몫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몫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트웜블리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캐서린(전 부인)에게 지난 잘못들을 사과하는 편지를 보낸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사만다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트웜블리의 곁에 있어주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건 또 다른 AI가 아닌 사람(에이미)이었다. 결국 우리의 살아감을 지지해주고 지탱해주는건 다른 무엇이 아닌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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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anfy 22.05.26. 00:10
성의있는 후기글 정말 오랫만에 보네요.
2등 Qddgj 22.05.27. 23:50
좋군요.. 인간 관계가 좋은점도 있고 힘든점도 있고..
3등 ㅇㅇ [code :7621b0] 22.05.28. 05:05
좋은 후기네요 그녀 영화가 다시 보고싶어지는 글입니다
kyuuu 22.06.01. 16:29
정성어린 후기 감사합니다!
조단팔 22.06.10. 23:54
감상평 잘 참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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